신이 되는 법, 현실 창조의 숨겨진 비밀 5편 ; 시뮬레이션 세상에서 신이 되는법

신이 되는 법, 현실 창조의 숨겨진 비밀

5. 시뮬레이션 세상에서 신이 되는 법

신이되는법
현실은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한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적 세계, 지각의 한계 너머에 있으나 똑같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비물질적 세계.
어떤 의미에서 세상은 가장자리가 없는 무한 크기의 이중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한쪽 면에는 물질 세계가 있고 다른 쪽 면에는 비물질적인 가능태 공간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가능태 공간은 모든 발생 가능한 사건의 시나리오를 보존하고 있는 정보체다.
거기에는 과거에 존재했고 지금 존재하고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으며, 꿈과 투시, 직관적 지식과 깨달음은 그것으로부터 우리를 찾아온다.
거울에 홀린 사람은 거기에 비친 그림자를 진짜 현실이라고 믿는다.
이 같은 거울 효과는 외부 세계가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조종 불가능한 것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
그에 따라 삶은 타인이 정해 놓은 규칙을 따라야 하는 게임처럼 돼 버리고 만다.
물론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를 이리저리 해 볼 수는 있지만 당신에게는 한 가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다.
주사위에서 빠져나와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이 되는 방법을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환상을 털어버리고 깨어나 주위를 둘러보기만 하면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당신은 이 현실의 한 측면이며 그와 동시에 그로부터 떨어져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그와 꼭 같이 꿈속에서 깨어 있으면서 이제는 꿈이 당신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꿈을 좌지오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당신은 자신의 독립성을 깨닫게 된다.
지금부터 거울 속 그림자의 환상에서 벗어나 거울의 백일몽에서 깨어나는 방법을 이야기해 보겠다.

1) 현실의 지배자 
생명체가 가장 원초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은 자신의 삶을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 통제하고 조종하고자 하는 욕구다.
그러나 주변 세계가 당신과 무관하게 존재하고 완전히 통제불능 상태로 당신에게 저기를 품고 대든다면 현실을 조종하기란 불가능하다.
당신이 삶을 사는게 아니라 삶이 당신에게 제멋대로 일어나고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것은 모욕적이고 두렵기까지 하다.
바로 여기서 주변 세계를 통제해야 한다는 절박하고 무의식적인 필요성이 생겨나는 것이다.

사람은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기를 열망하면서 그것을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토록 열망함에도 현실은 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 창조 작업의 결과로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안 되는 세상의 층이 형성된다면, 내 뜻과는 반대로 내가 원하지 않는 일만 일어나게 된다면, 마치 세상이 나에게 악의를 품고 분풀이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정말 그렇다면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부술 또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일까?

여기서 트랜서핑의 기본 원리를 적용해 보자.
자신은 자기 자신으로 다른 이들은 그들 자신으로 존재하도록 놓아두라.
세상을 모든 방향으로 풀어 놓아야 한다.
꽉 쥐고 있던 손을 느슨하게 풀어 놓으라.
자신의 욕구에 집착하면 할수록 반대되는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자석은 더욱더 강력해진다. 
이는 당신이 세상의 멱실을 잡고 있고 세상은 거기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당신에게 저항하고 있는 꼴이다.
만약 당신이 무언가를 밤낮으로 갈구한다면 당신의 마음은 강렬한 에너지의 불균형을 초래하게 된다.
하지만 우주의 에너지 법칙은 당신이 어떤 결과를 얻든 상관하지 않는다.
우주의 입장에서는 당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든 포기시키든 그저 안정된 균형 상태로 되돌아가면 그뿐이다.
이것이 바로 부추겨진 욕망들이 종종 우리를 정반대 현실로 데리고 가는 이유이다.
외부의 그 어떤 대상이나 사건에도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지 말라.
당신이 내린 선택의 결과를 내다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의 영혼뿐이다.
당신의 마음이 이대로 가다가는 큰일 나겠다고 생각하고 당신의 영혼 또한 그런 파국을 내다보고 있다면 그것은 어김없이 현실 속에 등장할 것이다.
영혼과 마음이 함께 동조한 것은 꼭 실현되고야 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혼이 어떤 선택에 긍정적 신호를 주는지를 늘 살펴야 한다.
당신의 영혼은 당신이 무엇을 해야, 무엇을 가져야 행복할지를 그냥 안다.
지금까지의 방식을 뒤집어 영혼의 순수한 의도에다 자신의 마음을 복종시킨다면 당신은 원하는 일이 저절로 벌어지는 행운의 흐름 위에 올라타게 될 것이다.
당신의 꽉 쥔 손아귀에서 힘을 빼고 세상의 멱살 잡기를 멈추기만 하라.
그러면 세상도 우호적으로 변해서 당신의 말을 따르게 될 것이다.
세상을 놓아주지 않는 사람은 자석처럼 반대 극성의 모든 것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기게 될 것이다.
2) 악의를 품은 세상
어떤 일이 당신을 균형 잃게 만들 수 있다면 그 일은 마치 악의를 품은 것처럼 꼭 일어나고야 만다.
당신은 어디론가 급하게 서두르며 조바심을 내며 가고 있다.
이 순간부터 매사가 당신에게 대항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우아하고 품위 있는 걸음거리로 당신의 길을 가로막는다.
자동차가 고장나고 버스는 연착하고 도로가 갑자기 막힌다.
마치 모든 일이 일부러 그렇게 준비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그들도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행동 동기를 만들어내는 힘은 보이진 않지만 실제하는 사념 에너지로부터 태어나는 펜듈럼이다.
갈등의 에너지를 수확할 수 있는 곳에는 언제나 팬듈럼이 나타난다.
이 구조체는 독자적인 생애를 시작하고 그 창조에 참여한 사람들을 자신의 법칙에 복종시킨다.
자신의 진동수에 동조하는 지지자를 끌어모아서 그들로부터 더 많은 에너지를 뽑아내고 그 힘으로 더욱 더 강력하게 진동한다.
펜듈럼은 서로 대립해 있는 사람들의 잠재 의식 속에 들어 있는 동기를 조종한다.
그리고 그 조종의 방향은 갈등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쪽으로 맞춰진다.
펜듈럼의 올가미에 주의가 사로잡히면 사람들의 잠은 더욱더 깊어진다.
예컨대 군대, 정당, 종교 단체 등에서는 사고와 행동 방식에 관한 고정관념이 형성된다.
이것이 사람을 잠재워 넣으면 그 사람의 잠재 의식은 팬듈럼 앞에 완전히 개방된 채 팬듈럼의 좀비처럼 움직이게 된다.

현대의 대중 매체와 오락산업 또한 하나의 단순한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그들이 당신에게 보여주고자 애쓰는 것은 이것이 성공의 모델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일까'에 대한 불안감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언제나 비교의 필요성이 존재한다.
그래서 다른이의 성공을 보게 되면 그것을 모델로 삼으려는 경향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표준에 따라서 반드시 이러저러하게 행위해야 한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펜듈럼의 규칙은 이렇게 말한다.
'나처럼 해야 해'
'표준에 맞추고 자신을 버려'
사람들은 세워져 있는 표준에 자신을 맞추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 결과 찾아오는 것은 영혼의 불편함과 불만족뿐이다.

매트릭스 같은 영화는 우연히 나온게 아니다.
매트릭스 속 사람들이 온몸에 튜브를 꽂고 배양기 속에 누워 있는 비유는 현실과 아주 흡사한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그 강요된 대열이 현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면 반드시 대열 안에서야 한다는 규칙이 환상이다.
대열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향할 수 있다는 것이 진정한 현실인 것이다.

펜듈럼의 규칙을 깨는 자는 리더가 되거나 변절자가 된다.
스타는 스스로 태어나고 펜듈럼은 그에게로 조명을 비춘다.
무리의 대열에서 빠져나온 사람은 성공의 새로운 본보기를 창조해 낸다.
펜듈럼은 개성을 용인할 수 없지만 떠오르는 스타를 바라보며 그를 자신의 총아로 만드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다.

새로운 규칙은 대열의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스타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대열에서 벗어날 때 당신은 싸울 필요는 없다.
그저 가만히 빠져나와 조용히 미소 지으면 된다.
그런 다음 자신의 길을 향해 가는 것이다.

3) 한낱 꿈
우주는 마치 인간들과 순박꼭질 놀이를 하는 것 같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싫어하면서 말이다.
사실 세상은 단지 자신의 정체를 숨길 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씌워 주는 가면을 언제든지 뒤집어을 준비가 되어 있다.
우주에게 물질과 의식 중 어느 것이 우선인지를 물어볼 필요도 없다.
우주는 또 그렇게 가면을 바꿔 쓰고는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단면만 보여 줄 테니까.

결국 세상은 도망다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처럼 행동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현실은 거울과 마찬가지로 두 세계를 가지고 있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질 세계와 지각의 한계 너머에 존재하는 비물질적 세계, 그리고 거울의 저편에는 가능태 공간이 존재한다.
그것은 모든 가능한 사건들의 시나리오를 담고 있는 정보체다.

현재 현실 세계에서 발생하는 어떤 사건은 많은 가능태들 중 하나가 물질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밤마다 그곳에 간다는 사실에 역설이 담겨 있다.

꿈은 흔히 생각하는 것과 같은 환영이 결코 아니다.
사람들은 꿈을 환상의 세계 정도로 치부해 버린다.
만약 꿈이란 것이 우리의 뇌가 만들어내는 현실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면 생전 본 적이 없는 광경들은 대체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인간의 정신 중에서 의식적인 것을 마음과 연결짓고 잠재 의식을 영혼과 연결짓는다면 꿈이란 영혼이 가능태 공간 속을 날아다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음은 꿈을 상상해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영혼이 정보장에 직접 접속할 수 있다면 거기에는 모든 시나리오와 무대 장치들이 영화 필름의 각 장면들처럼 정적인 상태로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깨어나서 느끼는 시간이란 단지이 영화 필름이 돌아갈 때 일어나는 현상인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곳으로부터 이 삶으로 나왔고 새로운 모습으로 거울 표면에 나타나기 위해 무대 뒤에서 옷을 갈아입듯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가면 극장에서 배우들은 끊임없이 배역을 바꿔가며 출연한다.
하나의 역할을 마친 뒤에 배우는 잠시 무대 뒤에서 가면을 바꿔 쓰고 이전에 무대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잊은 채 다시 게임에 참여한다.
배우는 자기의 배역에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깜빡 잊어버린다.

우리는 어린아이일 떄, 자신의 게임에 대한 완전한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삶이 한낮 게임일 뿐임을 알고 있기에 마치 관객처럼 지켜보며 초연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가며 놀이는 끝났고 삶은 심각한 것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자기 게임의 포로가 되어 눈을 뜬 채 무의식적인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이 꿈에서 깨어날 방법은 무엇인가?
답은 간단하다.
현실을 꿈처럼 인식해 보라.
자각몽과 같은 의식적인 꿈 속에서만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
객석으로 내려가서 지켜보라.
관찰자로 머물고 자신을 빌려주면서 초연하게 행동하라.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당신은 이미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4) 신들의 꿈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영혼은 신의 일부이다.
그리고 모든 삶은 신의 꿈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신을 잘 섬기는 사람들은 선한 자들이고 믿지 않는 자들은 죄에 빠진 자들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위해, 동시에 모두를 위해 자기들은 면제를 받았다는 등의 고정관념을 만들었다.
우리는 올바르고 당신들은 올바르지 않다는 확신의 근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사실 이 또한 종교의 펜듈럼으로부터 얻는 환상이다.
자기 자신을 본래부터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왜 그래도 신을 찾는 것인가?

많은 경우 사랑 때문에 신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라 두렵기 때문에 신을 찾는다.
실제로는 자기의 자아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다.
자아는 모욕감을 느끼기 전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게 될 때 자신이 완벽하지 않음을 발견할 때 자아가 일어나는 것이다.
자아의 유일한 목적은 자기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데에 있다.
그것을 확인하지 못하면 노여워하고 마음의 불편을 느끼며 그런 느낌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게 된다.
신에게 귀의할 때 당신은 자아에서 벗어났다고 느낄 것이다.
하지만 신은 밖 아니라 당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들을 곁눈질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신에게로 가는 진정한 길이다.
당신을 어떤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하고 당신이 변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마라.
펜듈럼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인식을 빼앗았을뿐만 아니라 신의 일을 하는 것을 신을 숭배하는 것으로 슬쩍 바꿔치게 하여 삶의 의미 자체를 왜곡시켜 놓았다.

신은 창조된 현실의 모든 측면을 체험하고자 한다.
신은 숭배받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삶의 목표와 신의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바로 공동 창조, 곧 신과 함께 창조하는 것이다.
당신은 자기의 세계의 층을 만들어내면서 신과 교감한다.
당신이 창조물을 만들면서 기뻐할 때 신도 함께 기뻐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을 진정으로 섬기는 것이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그 창조적 능력을 믿는 것이다.
당신이 자신의 능력을 믿는만큼 신을 믿는 것이다.
우리의 세계는 꿈의 극장이며 우리와 신은 관객인 동시에 시나리오 작가이며 감독이고 배우다.

한 가지 중요한 결론은 각 생명체에게 각자의 지각 수준에 따라 현실을 형성할 권리와 자유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 지각 수준에 따라 무의식적인 꿈속의 삶을 살거나 의식적인 꿈속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5) 기나긴 꿈 
세상은 당신이 흥미를 잃은 후부터 많이 변해 버렸다.
잘하는 과정에서 당신과 세상 사이에는 벽이 생겨 버렸다.
천진남만함은 소외감으로, 신뢰는 의심으로, 우정은 타산적인 이해 관계로 변질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세상은 당신에게 화를 내지도 않았고 당신을 버리지도 않았다.
만약 그렇게 생각했다면 당신은 오해를 했을 뿐이다.
세상은 다만 쓸쓸한 생각에 잠긴듯 말 없이 냉담한 태도로 서운하게 구는 옛 친구 곁을 묵묵히 따라 걷고 있는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라.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당신을 보살피고 있다.
그러나 당신은 세상이 분명히 나빠졌으며 옛날처럼 되돌아갈 수는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무심히 세상의 등을 돌린 채 기나긴 잠에 취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단지 당신의 태도가 달라졌고 당신 생각의 반영으로서 그런 현실이 나타난 것뿐이다.

이제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켜면서 잠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라.
이것이 바로 당신이 함께 좋은 시절을 보냈던 당신을 늘 보살펴 주던 여전히 그대로인 그 세계인 것이다.
자신이 마침내 기나긴 꿈에서 깨어난 것을 깨닫게 된다면 얼마나 기쁠지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제 당신은 돌아와 세상과 함께 있으므로 모든 일도 다시금 옛날처럼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재촉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당신의 반응은 한결같이 세상은 어떤 경우에도 나를 보살펴 주고 있다는 태도여야 한다.
그러면 당신은 늘 행복한 인생들에게 머물 것이다.
세상은 당신을 불쾌한 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다.
세상이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할 수 있는지는 당신이 알 수 없다.
그냥 세상을 믿어보라.
세상에 대한 당신의 태도를 조종할 때 당신은 현실의 조종자 트랜서퍼가 될 것이다.

영혼과 마음의 일치 속에서 태어난 격한 감정은 심상에 선명한 윤곽을 그려준다.
그 결과 그 심상의 내용에 상응하는 것들이 우세하게 반영되기 시작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우리 존재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산다.
현재 우리의 모습은 과거에 우리가 했던 생각의 결과다.
당신은 자신이 바꿀 수 없는 상황에 지배받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앞선 내용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과 행동은 곧 나의 미래다.
당신은 현재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는가.
당신이 바꿀 수 없다고 여기는 상황은 사실 무대의 소품, 곧 환상이며 원하기만 하면 깨뜨릴 수 있는 것이다.
생각의 방향을 조종하면 현실을 조종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 한 현실이 당신을 조종할 것이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에게 요구하고 부탁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게 주문하고 세상이 그 주문을 실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세상은 당신의 태도를 반영하는 거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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