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게임에서 승리하는 방법
삶이라는 게임에서 승리하는 방법
세계적인 뇌과학자 라마찬드란 박사는 우뇌가 손상된 환자에게 왼손을 움직여 보라고 말합니다.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환자가 움직이지 않자 박사는 이렇게 묻습니다.
"왜 가만히 계세요?"
환자가 대답합니다.
"그러는 박사님은 왜 아무 말이 없으세요? 왼손은 한참 전에 움직였는데요."
하지만 환자의 왼손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사실 우뇌는 몸의 왼편을 담당하기 때문에 운해가 손상된 환자는 왼쪽 신체가 마비되어 왼손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왼손이 마비 돼서 못 움직이는데요."라고 대답하는게 상식적으로는 맞습니다.
하지만 어떤 환자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해요.
저는 왼쪽이 훨씬 세서 박사님을 한 손으로 들어올릴 수도 있어요.
근데 오늘은 컨디션이 영 안 좋네요.
박사는 이번에는 그릇이 잔뜩 노인 쟁반을 들어보라고 시킵니다.
보통 반신마비 환자들은 한쪽 손 밖에 쓸 수 없으니 멀쩡한 손으로 쟁반 가운데를 받쳐 들어올립니다.
하지만 몇몇 환자들은 마치 두 손으로 쟁반을 잡는 것처럼 한 손으로만 쟁반의 끝을 잡아요.
당연히 쟁반을 다 엎지르기
되고 엎지른 이유에 대해 온갖 변명을 시원하지만 왼손이 마비 됐기 때문이라고는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환자들은 모두 우뇌가 손상되었고 따라서 그들의 거짓말은 모두 좌뇌가 한 짓이었습니다.
좌뇌는 상황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석하고 이 해석을 그럴 듯하게 설명하는 기능을 타고 나는데요.
라마찬드란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죄뇌는 이야기의 개연성을 유지하고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 따에는 신경 쓰지 않는 거 같습니다.
세계적인 사회 심리학자 리처드 니스벳 일반인들에게 거의 똑같이 생긴 잠옷 네 개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잠옷을 골라보라고 해요.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오른쪽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이 실험의 경우 에도 맨 왼쪽에 있는 잠옷을 10명이 선택할 동안 맨 오른쪽에 있는 잠옷은 40명이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연구진이
"오른쪽 잠옷을 고른 이유가 뭔가요?"
이렇게 물었을 때 "아, 오른쪽에 있는게 왠지 모르게 좋아요."라고 대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대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질감이 조금 더 부드러운 거 같아요."
"색깔이 좀 더 밝아서 좋아요."
한마디로 사람들의 좌뇌가 선택에 대한 그럴듯한 이유를 지어낸 거죠.
연구진은 오른쪽 잠옷을 선택한 참가자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사실 인간은 자연스럽게 우측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고요. 그게 여러분이 맨 오른쪽 잠옷을 고는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참가자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이를 부정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연구진에게 정신병자가 아니냐고 항의까지 했고요.
사람들은 본인의 선택이 자신이 정말 선호에서 이루어진게 아니고 단지 오른쪽을 좋아한다는 이유 때문이라는 개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합니다.
이처럼 좌뇌가 만드는 자아라는 개념은 매우 중독적이고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 대한 집착을 쉽게 끊어낼 수 없습니다.
글로벌 햄버거 체인 M사에서도 비슷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책상 위에 커피 두 잔이 놓여 있고 하나는 2,000원 하나는 4,000원이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참가자들에게 평가를 부탁합니다.
참가자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2,000원짜리 커피는 너무 신맛이 강해요. 4,000 원짜리는 원두향이
더 깊게 나고 제가 맛에 좀 민감한 편인데 4,000원짜리 제가 좀 더 좋아하는 스타일인 거 같아요."
하지만 두 커피 모두 M에서 새로 출시한 같은 커피였습니다.
이번엔 여성 실험 조교가 균형 감각에 대한 실험이라 거짓말하고 남성 참가자에게 눈가리개를 씌우고 의자에 안게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성 조교가 있던 곳에서 우당탕 소리가 나고 의자가 뒤로 확 젖혀져 남자는 무슨 일인가 싶어 안대를 벗으려 하지만 조교는 그대로 계시라고 별일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실이 모든 소란은 의도된 것이었고 다른 그룹에게는 소란 없이 조용이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실험이 끝나고 남성 참가자들에게 여성 조교가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물었을 때 남성들이 대답은 어땠을까요?
소란이 있었던 남자들은 여성 조교를 더 매력적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소란은 참가자들애개 더 빠른 심장 박동과 더 많은 땀을 유발했습니다.
이번엔 여성 조교를 남성 조교로 바꿔봤습니다.
이번에도 소란은 남성들의 신경계를 자극했지만 여성 조교 때하는 달리 남자 조교가 더 마음에 안 든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런 연구들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좋고 싫음이 사실은 같은 자극에 대한 좌뇌의 해석일뿐일 수 있다는 겁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존재 자체는 긍정도 부정도 아니라는 거죠.
이처럼 우리는 좌뇌라는 해석 장치에 지시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좌뇌는 항상 켜져 있고 마음대로 켜고 끌 수도 없는데 대체 뭘 어떡하라는 걸까요?
뇌과학자 크리스 나바는 일단 한 번이라도 녀석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해요.
방금 머릿속에든 판단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게 좌뇌의 해석이라는 걸 한 번이라도 눈치 채고 나면 좌뇌와 나를 자동적으로 동일시하는 걸 멈출 수 있고 그렇게만 된다면 좌뇌가 만들어내는 이야기, 감정, 스트레스로부터 한발짝 떨어져 고통을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좌뇌는 범주화, 즉 어떤 기준을 이용해서 나누는 행위를 좋아하는데요.
이런 흑백 스펙트럼으로 구성된 막대가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검은색이 흰색이 되나요?
어느 정도부터 인생의 실패인가요?
돈이 얼마나 있어야 부자가 되었다 할 수 있나요?
행복과 슬픔의 경계는 어디인가요?
나이바우어는 말합니다.
리 머릿속에 해석 장치가
있고 그게 판단을 통해 끊임없이 범주를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순히 알아차리기만 해도 그 해석을 택할지 말지 선택권을 갖게 되고, 그럼 우리는 그 문제를 예전처럼 심각하게 보지 않게 됩니다.
외국인 친구가 한국에 놀러옵니다.
친구가 한국을 보여 달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서울 부산 대국 광주를 돌며 구경시켜 줍니다.
투어가 끝났는데 친구는 다시 물어요.
덕분에 여기저기 잘 구경은 했는데 한국은 어디 있어?
우리는 한국, 서울 대학, 회사 이런 범주와 개념이 사회적으로 유용하게 쓰이고 있는 가상의 존재임을 알죠.
하지만 우리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절대 가상이 아니고 진짜라고 굳게 믿습니다.
한 실험에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생긴 아무 의미 없는 그림을 보여줬습니다.
한 그룹은 책상에 앉아 편안하게 그림을 봤고 다른 그룹은 스카이다이빙 직전, 다시 말해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기 직전에 그림을 봤습니다.
편안히 그림을 본 그룹은 그림에 별다른게 없다고 대답했지만 스카이다이빙 그룹은 그림의 뭔가 패턴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한마디로 상황이 위험하다고 느껴지는만큼 자네가 패턴을 찾아내는
경향이 증가한다는 겁니다.
좌뇌는 더 많은 생각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지키려고 합니다.
명상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처음 명상에 들어 마음이 고요해지고 시작할 때 느닷없이 온갖 이야기와 문제거리가 떠오른다고 합니다.
더 많은 생각을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를 방어하려는 이런 경향은 소위 자아라는 이미지를 유지하려는 필사의 몸부림입니다.
명상의 달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이 이렇게 끝없이 얘기하려 하는 이유는 그것이 마음이 계속 존재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나이바우어도 이렇게 덧붙여요.
마음이라는 건 생각할 때만 존재하며이는 생각함이 곧 자인 증거입니다.
그럼 대체 이 좌뇌라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마치 숨을 쉬는 행위가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물속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흡을 자각하기 어려운 것처럼 우리는 좌뇌의 해석을 진실이라 믿고 좌뇌가 곧 나라고 동일 시험을 살아왔기 때문에이 좌뇌라는게 대체 뭔지 제대로 느껴 보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나이바우어는 단 10초 만에 좌뇌를 느끼는 방법을 소개합니다.
지금 잠시 영상을 멈추고 10초간 주의를 둘러보세요.
그리고
뭐가 눈에 띄는지 머릿속에 목록을 작성해 보세요.
작성해 보셨나요 무엇을 적으셨네요?
아마 책상, 소파, 화분, 그림, 컴퓨터 같은 걸 적으셨겠죠?
하지만 혹시 그 목록에 빈 공간이라 적으신 분이 계실까요? 아마 한 분도 없으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로이 부분이 우리 뇌의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빈 공간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가장 압도적으로 많은 부분이고 사물과 사물을 구분 수 있게 해주지만 좌뇌는 빈 공간을 무시합니다.
대신 사물의 초점을 맞추고 이름을 붙이고 분류하고 이건 비싼 거 이건 쓸모없는 거 이건 버릴 거 의미를 만들고 평가표를 붙입니다.
재미 있는 것은 바깥 세상뿐 아니라 우리의 내면 세계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좌뇌는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그 순간에 파도를 붙잡아 이렇게 분리합니다.
'이 생각은 진짜 좋은 생각 같다', '이 기분은 별로야, 기분 전환 좀 해야겠어.'
좌뇌는 파도와 파도 사이에 공간, 그리고 깊고 넓은 바다라는 거대한 공간에는 집중하지 않습니다.
나이바우어는 이렇게 말합니다.
결국 '나'라는 자아감도 임의적인 움직임들 속에서 어떤 패턴을 보는게
아닐까요?
밤하늘의 별을 보며 단지 개념일 뿐인 별자리를 찾아내거나 구름을 보며 '개를 닮았다', '닭을 닮았다'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이바우어의 강의에서 그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지금 한번 손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보세요.
학생들이 손을 머리 위로 들면 그는 이렇게 물어요.
방금 어떻게 손을 움직였는지 한번 말로 설명해 보세요.
그럼 학생들은 보통 몰라요.
'그냥든 건데요.' 이렇게 대답하거나 말로 설명을 하다가 포기하기도 합니다.
손을 드는 일, 미소를 짓는 일, 자전거를 타는 일 등은 사실 아주 정교하고 복잡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사소하고 무의식적인 것으로 치부됩니다.
왜냐하면 언어라는 영역 밖에서 수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생각이나 해석이 의식적으로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점이 좌뇌가 마음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명상, 요가, 스포츠, 악기연주, 고장난 걸 고치거나 내손으로 직접 뭔가를 만들 때 우리는 그저 움직임 속에서 행할뿐 여기에 생각이 끼어들 틈은 없습니다.
단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뿐 분명 고도로 의식화된 상태죠.
무아지경의 상태이며 몰입하는 상태입니다.
좌뇌가 덜 관여하고 우뇌가 더 깨어 있는 상태라고도 할 수 있죠.
하지만 좌뇌는 이 모든게 지나가고 나서 "역시 나야, 내가 굉장한 일을 해냈어." 이렇게 말함으로써 마음의 주인으로서의 우위를 우뇌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말 못하는 우뇌는 그저 듣고 끄덕여 줄 뿐이죠.
물론 좌뇌라는 해석 장치는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도구입니다.
하지만 머릿속 목소리를 진짜 나로 착각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가 도구를 쓰는게 아니라 도구가 나를 쓰게 됩니다.
그렇다면 자네의 독재를 멈출 순 없는 걸까요?
나이바우어는 좌뇌 대신 우뇌를 활성화하는 몇 가지 방법들을 소개합니다.
구체적인 방법들은 그으 책 <자네, 좌뇌에게 속았네!>에 소개 되어 있는데요.
그 중 하나는 말도 생각도 필요 없는 일들을 그냥 하는 겁니다.
자뇌가 만든 이야기에 맞춰서 돈을 벌기 위해서도 자기 개발을 위해서도 아니라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즉흥적으로 실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고, 남들을 돕고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좌뇌가 보기엔 하등 생산성도 없고 쓸데없는 일이라 싫어하겠지만 하루에 딱 한 번이라도 아무 이유 없이
뭔가를 해 보라고요.
이번엔 사람들의 에게 2,000달러를 주고 숫자 카드 묶음 네 개를 줍니다.
참여자들은 네 묶음 중 원하는 묶음에서 카드 하나를 뽑습니다.
뽑은 카드에 +100달러가 써 있으면 2,000달러에 100달러를 더해 잔고는 2,100 달러가 됩니다.
하지만 카드 중에는 - 200달러라고 써 있는 나쁜 카드도 있었습니다.
연구진은 그렇게 총 100번을 카드를 뽑게 하 후 최종 상금을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사실 A와 B묶음은 +200 달러나 +100달러 럼 최고의 카드도 있었지만 -200달러나 -300달러 같은 최악의 카드도 섞여 있었습니다.
반면 C와 D 묶음은 +30달러나 +20달러처럼 얻는 건 소소해도 - 20달러 - 10달러처럼 크게 잃지도 않았습니다.
연구진은 A와 B 묵음에서 자주 카드를 뽑으면 상금을 잃고 C와 D 묶음에서 뽑으면 상금을 더 얻도록 설계했고요.
사람들이 이런 설계를 의식적으로 파악하기 시작한 건, 다시 말해 좌뇌가 C와 D 묶이 더 유리하다는 걸 눈치채기 시작한 건 약 50번에서 80번 정도 카드를 뽑고 난 뒤였습니다.
연구진은
사람들의 손바닥 땀샘에서 땀이 나는지도 측정했는데 손바닥에서 땀에 난다는 건 불안해진다 의미였습니다.
측정 결과 놀랍게도 카드를 열 번 정도 뽑았때을 때부터 A오 B 묶음에 손을 뻗을 때마다 손바닥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좌뇌의 의식적인 해석 장치에 비해 무의식적 지능이 훨씬 빠르다는 뜻이었죠.
재밌는 건 몇몇 사람들은 C와 D가 유리하다는 걸 100번을 다 뽑아도 모르는데 이런 사람들조차도 A와 B로 손을 뻗을 때는 땀이 났다는 겁니다.
결국 우뇌는 옳은 선택을 알고 있었지만 좌뇌는 전혀 알아채지 못한 셈입니다.
어쩌면 직감이라는 건 좌뇌의 분석력과 언어를 거치지 않고도 곧바로 할 수 있는 운의 능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다른 영상에서 더 자세히 소개드렸던 하버드대 뇌과학자 질 볼트 테일러는 좌뇌의 뇌출혈을 겪으며 잠시나마 좌뇌라는 해석 장치가 완전히 꺼져버린 상태를 경험했죠.
테일러는 온 우주와 하나가 된듯한 일체감과 어떤 해석과 평가도 없는 평화로움 무한한 자비심과 모든 것에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나이바우어는 테일러가 경험한 것들이 우뇌의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좌뇌가 비가 오는 날을 '아이씨, 비가 와서 하루를 다 망쳤어.' 이렇게 해석한다고 해 봅시다.
나이바우어는 만약 우뇌가 말할 수 있다면 '비가 오는 현실을 받아들이겠어.' 보다는 '비가 와서 너무 기뻐.' 이렇게 말할 거라 확신합니다.
실제로 킹스칼리지런던의 롤랜드 잔 연구진은 사람들이 감사함을 느낄 때 우뇌 쪽에서 더 큰 활동이 포착되며 더 많이 감사하는 사람들은 우뇌의 대뇌피질이 더 많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은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하고,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로운 곳이라고요.
어쩌면 진정한 감사는 실제 세상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리해 보면 삶이라는 게임을 진행하는 첫 번째 방법은 오늘 말씀드린 내용을 모두 잊고 자뇌가 진짜 나라고 계속 믿는 것입니다.
좌뇌와 동일시를 유지하고 현대 사회라는 극장에서 역할에 100% 몰입합니다.
이 범주와 해석의 세계에서는 좋은 날도 있지만 나쁜 날도 있고 친구도 있지만 덕도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심각함과 긴급함으로 게임에 열정적으로 임하죠.
한마디로 큰
기쁨도 얻을 수 있지만 큰 고통을 피할 수도 없습니다.
현실 세계에서 가장 크게 물질적 사회적 성공을 거둘 수 있기게 지구라는 행성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인기는 선택지이기도 하죠.
그럼 이번엔 반대편 극단으로 가보죠.
두 번째 선택지는 우뇌의 힘을 쓰는 이른바 깨달음의 길입니다.
싯다, 성자, 스승, 수도승이 지나갔던 길이죠.
명상, 마음챙김, 요가, 연민, 감사, 기도, 만물이 서로 나누어질 수 없다는 세상에 대한 큰 그림을 기반으로 합니다.
첫 번째 방법처럼 큰 고통을 경험하진 않지만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히노애락애오욕과 멀어집니다.
한마디로 삶이 결국 한낮 게임이라는 생각이 너무 강해지면 그 어디에도 몰입하지 못하고 그 어떤 재미도 느끼지 못하게 될 수 있죠.
그래서 제 3의 선택지는 중도라고 불립니다.
앞에 두 가지 길에 한 발씩 걸치기를 선택하면 게임이 딱 재미있을만큼만, 삶이 너무 심각해지지 않는 재미만 유지합니다.
사람들이 공포 영화를 즐기고 놀이동산에서 롤러코스트를 타는 건 자신들이 실제로는 안전하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주적 의식은
모든게 안전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습니다.
좌죄가 끔찍한 비극이라고 규정짓는 것일지라도 말이죠.
우뇌만이 우세한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하면 농담을 즐길 수도 비극의 눈물 지을 수도 없습니다.
좌뇌가 만들어 주는 판단과 해석을 통해서 우리는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있죠.
나이바우어는 말합니다.
결국 삶이라는 게임에서 승리는 애초에 이것이 단지 게임일 뿐이면 그 게임의 설계자가 나 자신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요.
법륜스님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신 적 있는데요.
게임에서 아이템을 잃어 울고 있는 아이가 있습니다.
엄마는 이렇게 말하죠.
"그게 울 일이야? 컴퓨터 끄고 와서 밥이나 먹어"
불교도 현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게 괴로울 일입니까? 생각과 욕망을 끄세요. 거기서 빠져 나오세요."
우리가 보는 현실은 좌뇌가 만든 매트릭스지만 영화 매트릭스 속 주인공들과 달리 우리는 결국이 땅에 두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게임 속 레벨을 올리고, 아이템을 얻고, 좋은 친구를 사귀면서 삶의 재미를 느끼죠.
하지만 게임이 너무 심각해지고 몰입하게 되면 삶이 끝났다, 인생이 망했다, 나는 최악의 인간이다, 도저히 다른 길이 없다 같이 좌뇌가 만들어낸 판단과 해석에서 오는 고통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지만 크게 보면 언제나 다른 길이 있다는 것, 끝났다, 망했다, 그리고 나라는 개념조차도 마음이 설계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면 레벨이 조금 천천히 올라도, 원하는 아이템을 얻지 못해도, 좋은 친구가 떠나가도 크게 좌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법륜 스님은 항상 말씀하십니다.
괴로움도 마음의 습관이라고.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병이 나면 건강만 하면 참 좋겠다, 눈을 다치면 눈만 보여도 참 좋겠다, 다리를 못 쓰게 되면 걷기만 해도 좋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럼 눈 하나 안 보이는게 불행인가?
누군가에게는 하나 보이는 것만으로도 행복입니다.
안 보이는 하나를 가지고 불행으로 삼을 건지 보인는 하나를 가지고 행복으로 삼을 건지는 본인의 선택입니다.
이렇게 행복은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다 내팽게치고 욕심의 눈이 어두워서 다른 데서 행복을 찾아다녀요.
그러다 죽을 때까지 행복하지 못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 지금 행복하세요.
존재는 좋고 나쁜게
없어요.
그걸 우리가 행으로 인식하느냐 불행으로 인식하느냐.
'부정적'으로 보는 습관을 '긍정적'으로 바꾸는게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레너드 제이콥스의 시를 소개합니다.
일찍 도착하려고 서둘지 말라.
그곳에 도착하면 무엇을 하려는가.
당신이 도착하는 순간 놀이는 끝난다.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하나도 없다.
심각하게 받아들일 연극도 하나도 없다.
심지어 탄생과 죽음이라는 연극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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