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가브리엘의 <허구의 철학>

존재에 대한 관점 -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허구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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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물론 존재하겠죠.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금이 영상을 보고 계시지도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존재한다고 보시나요?
지금 들고 있는 핸드폰, 쳐다보고 있는 모니터 화면, 누워 있는 침대, 신고 있는 신발, 들이귀소 있는 공기. 
모두 존재하는 걸까요?
여기까지는 존재한다고 보시는 분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그런데 복잡한 대상으로 향할수록 사정은 더 복잡해집니다.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에 유발 하라리는 종교, 국가, 기업은 일종의 픽션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완전히 명확하게 존재하는 대상이라기보다는 환상에 해당한다는 거죠.

인류가 생존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부터 사회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는데 그때 많은 수의 사람들을 통합해서 하나의 사회를 유지하는 역할을 각종 픽션이 맞게 됐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대한민국은 가상의 공동체입니다.
이 이름과 제도가 우리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역할을 하죠'.
물론 대한민국은 실제적 기반이 있긴 합니다.
영토도 있고, 국민도 있고, 정부도 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국민 전체가 대한민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됐다고 해봅시다.
이런 일은 역사적으로 실제로 일어나곤 합니다.
혁명이 일어나서 나라의 이름과 정체성이 바뀌고 그걸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일은 빈번이 일어납니다.
만약 사람들이 대한민국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시작하면 대한민국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집니다.
존재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 되죠.

이렇게 픽션으로 존재하는 대상들은 바위나 강처럼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대상과는 본질적으로 달라 보입니다.
물리적인 대상들은 우리가 무슨 믿음을 갖든 상관없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바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고 해서 정말로 바위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건 아니죠.
반면 픽션인 대상들은 우리의 믿음에 의존합니다.
여기까지는 별로 어려울게 없죠.
이 구도에서 보면 아마 픽션인 대상들은 물리적 대상들이라는 더 근본적인 층에 의존에서 존재할 겁니다,
예를 들어서 국가는 국가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는데 사람은 어디까지나 생명체로서 물리적으로 존재하고 있죠.
그리고 사람을 이루고 있는 세포는 더 작은 물질들로 이루어져 있고요.
그 더 작은 물질들은 우주를 이루고 있는 기본 입자로 이루어져 있을 겁니다.
우주의 기본 입자로 이루어져 있는 인간이 어쩌다 다보니 상상력이 풍부한 뇌를 갖게 돼서 여러 가지 환상과 믿음을 품으면서 만들어내는 것들이 곧 국가, 공동체, 기업, 법 같은 픽션인 대상이죠.

이렇게 생각하면 우주의 존재에서 복잡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게 이 명쾌한 논리로 설명됩니다.
실제로 이런 깔끔한 생각은 이 시대에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존재에 대한 표준적인 그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번 조금 더 생각을 이어나가 보면 사정은 더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실이 복잡성의 단계까지 들어가야 존재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고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 한번 질문을 던져 봅시다.

과연 물리적 대상은 정말로 우리의 믿음과 별개로 존재하는 걸까요?
우리는 보통 물리적 대상들은 물리학적으로 알아낼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물질이나 힘을 통해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서 말했듯이 원자는 그것보다 더 작은 근본적인 물질을 통해 이루어져 있고, 또 물리학적인 법칙에 따라 운동하면서 존재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상시에 보는 물질들. 예를 들어 새, 원숭이, 벌레, 핸드폰 같은 대상들은 모두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가장 기초적인 물질들은 아닌 셈입니다.
더욱 기초적인 물질을 통해 만들어져 있는 무언가 뿐이죠.

그리고 이러한 만들어진 대상들은 항상 허구적인 면모를 갖습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코끼리 한 마리가 세계 속의 하나의 대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코끼리 몸에 기생하는 아주 작은 벌레의 입장에서는 코끼리는 하나의 세계로 나타날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코끼리 한 마리라는 대상은 그 벌레의 입장에서는 존재하지 않겠죠.
아마 인간과 아주 다른 지각 체계를 가진 외계인의 입장에서도 코끼리 한 마리는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그 외계인은 코끼리 가족 하나를 묶어서 하나의 대상으로 볼지도 모르고 코끼리를 포함한 초원 전체를 하나의 대상으로 볼지도 모르죠.
원효대사 해골물 이야기가 여기에 적용됩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이 세상의 모습은 달라진다는 거죠.
그런데 이건 어디까지나 기초적인 물질들로 이루어진 더 커다란 물질들에 해당하는 이야기지 가장 기초적인 물질적 차원에 대해서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 아닌가요?
가장 기초적인 물질적 차원은 누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든 상관없이 똑같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는 물리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우주의 근본적인 물질들 자체가 물리학 지식의 발전에 따라서 변화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과거 사람들은 에테르라는 물질이 정말로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에테르는 우주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물질로서 전자기력, 혹은 중력이 전달되도록 하는 매질이 여겨졌죠.
이게 고대인들이 중세인들은 믿었던게 아니라 140년 정도 전까지만 해도 많은 물리학자들이 믿었습니다.
특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영향을 준 맥스웰의 전자기파 이론에서도 에테르는 필수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되었다고 하죠.
그러다가 현대 물리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에테르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에테르는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 걸까요?
예전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지금도 존재하지 않고,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까요?
문제는 과거 사람들은 에테르를 이용해서 우주의 다양한 면모를 표현했고 그게 그들에게는 유효한 지식이었다는 겁니다.
에테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이 세상을 바라봤을 때는 정말로 에테르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고, 우주의 다른 물질들도 에테르와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보였다는 거죠.

중력에 대해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과거 사람들은 중력이라는 힘이 직접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시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어떤 물체가 시공간에 휘어짐을 만들어내면서 어떤 간접적인 힘의 효과가 초래되는데 그게 바로 중력이라고 보고 있죠.
이때 과연 중력은 정말로 존재한다고 봐야 할까요?
아니면 어떤 더 근본적인 현상에 의해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 힘이라고 봐야 할까요?

어쩌면 물리학이 발전하면서 나중에는 중력에 관한 생각이 또다시 상당히 많이 바뀌어서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중력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보면 근본적인 물리적 대상들 자체가 인간의 지식 발전에 따라서 모습을 바꾸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물론 여전히 이렇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지식 발전을 통해 바뀐 건 우주에 대한 인간의 생각일 뿐이고 우주는 언제나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변함 없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믿어야 할까요?
우리가 아무리 과학을 발전시켜도 그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변함없는 우주의 모습을 알게 될 거라는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
아마 한 시대의 과학 이론은 계속해서 그 다음 시대의 이론에 의해 수정될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아마 인간에게 영원히 알려지지도 않을 근본적인 우주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어야 하는 걸까요?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제대로 안 적도 없는 그 대상을 왜 우리는 지지해야 하는 걸까요?

이 문제 의식은 이 시대에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 중 한 명인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생각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가브리엘은 그의 최신 저서 <허구의 철학>에서 형이상학적 실재론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이란 물리학에서 다뤄지는 우주, 즉 인간의 지식이나 믿음과 상관없이 이미 확정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그 우주만이 진정으로 실제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물론 현대 양자역학에 따르면 이 시각이 물리학적 시각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가장 근본적이고 진짜 존재라고 부를 만한 건 물리적인 대상들이고 나머지 대상들은 다 파생적 대상, 진정으로 존재하는 건 아닌 그런 대상이라고 보는 거죠.
픽션에 대한 유발 하라리의 견해도 이 형상학적 실제론 연결될 여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는 생명체로서의 인간을 확실한 존재로 세워 놓고, 그 생명체 인간이 생존하는 과정에서 사회적인 결속력을 높이는 매커니즘으로 픽션을 파생적으로 발생시켰다고 보는 거니까요.
즉 이 관점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면 정말 제대로, 가장 근본적으로는 일단 물리적 생명체로서 인간이 존재하고 있다는 그림을 자연스럽게 그리게 됩니다.
그 기초적 존재를 통해서 나머지 존재들을 설명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이런 형이상학적 실제로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현대적 신화라고 봅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완전히 객관적인 관점에서 상정되는 근본적인 우주, 실제적인 물리적 대상은 우리에게 결코 알려지지 않습니다.
언젠가 먼 미래에 알려질 거라고 상당히 불확실하게 희망만 할 뿐, 우리가 지금 실질적으로 알고 있는 건 우주의 근본적 사실들에 관한 우리의 견해가 계속 변해왔다는 것뿐입니다.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근본적 우주가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당연한 듯이 상정하는 건 일종의 종교적 믿음처럼 보입니다.
경험에 기초하지 않은 형이상학적 견해이며, 이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해석은 결코 아니라는 거죠.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한번 분석해 보면 실재와 실재의 모습 사이에 사이에 차이가 실재한다고 보는 입장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실재적인 것, 가장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분명히 있는데 다만 현재 우리가 가진 이론의 한계 안에서 그것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습은 그 실재와는 다르다는 거죠.
언젠가는 그 실재에 더 가깝게 다가가는 더 나은 이론을 세울 수 있고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입장에서는 바로 이 실재와 실재의 모습 사이의 차이를 실재하는 것으로 상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차이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실재하지 않는 것과 구별되는 실재하는 것 또한 존재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이 차이는 물리적인 것일 수는 없습니다.
만약 이 차이가 물리적인 것으로서 형이상학적 실재론자들이 생각하는 우주의 유일한 근본적 실재의 차원에 해당한다면 실재와 실재의 모습 사이에 차이가 존재한다는 도식이 어그러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런 의미에서 가브리엘은 형이상학적 실제로는 모순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는 바로 이 모순이 실재는 근본적으로 다층적이고 다원적인 수밖에 없다는 걸 우리에게 알려준다고 보죠.
실재하는 것을 상정하기 위해서는 실재하지 않는 것과의 차이 역시 상정해야 하며, 그 차이는 이미 실재와는 다른 차원의 무언가로 실재하는 것이어야 할 테니까요.
애초에 실재는 하나의 총체적인 무언가일 수 없고, 층이 나눠져 있는 다양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런 아이디어에서 이 세계의 존재에 대한 더 나은 해석으로서 가브리엘이 제시하는 건 의미장 존재론 입니다.
의미장 존재론에서 모든 대상은 오로지 어떤 의미장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봅니다.
의미장은 한 규칙 체계를 따르는 대상들의 배열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서 물리적 대상들의 의미장 안에는 물리적 대상들이 쭉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장 안에서는 상상의 동물이나 소설속 인물, 대한민국 같은 비물리적 대상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죠.
의미장은 잠정적으로 무한히 다양합니다.
의미장 중에는 존재하는 것으로 기대를 받았다가 실망으로 끝난 대상들의 의미장도 있습니다.
에테르가 대표적으로 이 의미 장에 속하죠.
이 의미장 안에서 에테르는 존재합니다.
반면 아직까지 암흑 물질이나 암흑 에너지 같은 대상은 여기에 속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속하게 될 수도 있겠죠.
또한 마녀나 우주의 물리적 중심 역시 이 의미장에 속합니다.
사람들은 한때 마녀의 존재를 믿었지만 이제는 믿지 않고, 한때는 우주의 중심점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보편적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죠.
가브리엘의 의미장 존재론의 특징은 모든 대상을 포함하는 의미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는 겁니다.
의미장이 잠정적으로 무한이 있다면 그중에는 모든 대상을 포함하는 의미장도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걸 세계라고 부르든, 우주라고 부르든, 총체라고 부르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궁극의 의미장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할 수 있죠.
하지만 가브리엘은 이런 의미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모든 의미장에는 빈틈이 있습니다.
모든 대상은 어떤 의미장에서는 존재하지만 어떤 의미장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현재 일반적으로 가장 확실한 존재라고 믿는 물리적인 대상들도 동화 속 대상들의 의미장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17세기 물리학의 의미장에서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25세기 물리학의 의미장에서도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죠.

어떤 대상이 확실히 존재하는 것과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다릅니다.
대한민국은 분명히 확실히 존재합니다.
여러 의미장 안에서 분명 존재하죠.
하지만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가브리엘의 생각에 어떤 대상이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건 모든 의미장 안에서 존재한다는 걸 뜻합니다.
그리고 그런 대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한다고 믿어야 할 적당한 이유가 없죠.
우리는 항상 어떤 대상이 그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그런 의미장을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브리엘의 주장은 존재와 관련한 상당히 허무한 견해로 들리기도 합니다.
만약 대상이 항상 특정 의미장 안에서만 존재한다면 우리가 진짜로 존재한다고 믿는 대상이나 허구적이라고 믿는 대상이나 다 어쨌든간에 존재한다는 말이 되는 거 아닌가요?
예를 들어서 한라산의 한 돌덩이나 유니콘이나 똑같이 각각 어떤 의미장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니 둘 사이에는 존재와 관련해 딱히 차이가 없는 것 아닐까요?
가브리엘의 생각이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각 의미장의 각각 다른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한라산의 한 돌덩이는 물리적 대상들의 의미장 안에 속할 겁니다.
그리고 그 의미장의 특징은 물리학적으로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대상들 포함한다는 겁니다.
반면 유니콘은 상상의 동물들의 의미장 안에 속할 텐데 그 의미장의 규칙은 물리학적 인정을 받는 것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죠.

이런 맥락에서 가브리엘은 존재와 실재 개념을 구별합니다.
그의 생각에 실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것과 관련한 진실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진실을 인지한다는 건 진실을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즉 우리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과 본질적으로 관련됩니다.

우리는 언제 진실을 인지할까요?
일상에서 우리는 매순간, 아주 많은 진실을 인지합니다.
저는 지금 제가 푹신한 방석 위에 앉아 있다는 진실을 인지하고 있죠.
이때 갑자기 누군가가 제가 잠시 정신을 잃게 만든 후 제 엉덩이에 마취주사를 놓고 잠시 후 깨어나게 한다면 저는 제가 푹신한 방석 위에 앉아 있다는 진실을 더 이상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엉덩이의 감각이 마비된 상태니까요.
저는 어쩌면 딱딱한 의자 위에 앉아 있다고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저는 진실이 아닌, 거짓을 알고 있는 상태가 됩니다.
이렇게 진실은 분명 거짓과 구별됩니다.
무언가가 진실이라는 건 거짓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애초에 거짓의 가능성으로부터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다면 진실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거짓의 가능성과 연결돼 있기 때문에 우리는 거짓이 아닌 진실을 알 수도 있는 거죠.
저는 의자 위의 푹신한 방석을 진실되게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진실되게 인지할 수도 있는 겁니다.
제 푹신한 방석은 이런 의미에서 실재합니다.
이 대상에 대해 저는 틀릴 수도 있고 진실을 알 수도 있습니다.

무언가가 실재한다는 건 그냥 그것에 대해 아무거나 상상해도 다 진실이 되는 그런게 아니라, 그것과 관련한 진실을 판별할 기준이 있는 채로 존재한다는 걸 뜻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순전히 허구적이기만 한 대상은 실재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에 관해 아무것이나 허구적으로 상상해도 다 진실이 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이 대상은 순전히 허구적이기만 한 대상들의 의미장 안에서 존재하긴 합니다.
하지만 실재하는 건 아닙니다.
실재하려면 진실과 거짓 사이에 구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소설속 인물이라는 허구적 대상은 실재하는 걸까요, 아닐까요?
가브리엘은 실재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소설 속 인물은 순전히 허구적이진 않거든요.
소설 속 인물은 아무렇게나 상상하는 것에 열려 있는게 아니라 소설이라는 기준을 통해 그 대상에 대한 진실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홍길동이 남자라는 건 홍길동전에 따르면 진실입니다.
누군가가 홍길동을 여자로 상상한다고 해서 홍길동이 여자가 되는 건 아니죠.
만약 홍길동이 누가 어떻게 상상하느냐에 따라 게이, 여성, 레즈비언 등 다양한 정체성이 다 진실이 되는 그런 대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홍길동을 실제적인 대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는 셈입니다.
완전히 허구적인 차원의 존재로만 홍길동을 대하고 있을 뿐이죠.

모든 경우에 거짓과 완전히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는, 어떻게 생각해도 무조건 맞게 되는 절대적인 진실은, 역설적으로 결코 진실일 수가 없습니다.
거짓과의 구별 지점을 잃어버린 무차별적 진실은 순전한 환상에 불과하게 됩니다.
가브리엘의 입장에 따르면 이 세상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누군가가 이 세상이 환상에 불가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견해 자체는 실재하는 무언가인 셈입니다.
그 견해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우리는 가려내고 시도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견해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결코 답을 확실히 알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견해의 참, 거짓이 결코 확실히 알려질 수 없다는 사실 자체는 실재하는 무언가가 되겠죠.

이렇게 우리가 어떤 견해를 품든 결국에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특정한 기준을 바탕으로 진실과 거짓을 나눌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존재하면서 자연스럽게 특정한 관점을 품고 그 관점을 바탕으로 진실과 거짓을 나눕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항상 실재와 마주하게 됩니다.
진실과 거짓의 구별이 무의미해지는 그런 환상적인 지점들은 결코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를 가득 채울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세계는 기본적으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낼 수 있는, 실재하는 것들이 아주 많이 들어차 있는 곳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가브리엘의 견해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인데요.
실제 이론은 훨씬 더 복잡한데 최대한 단순화시켜서 제가 말씀드려 봤습니다.
마지막으로 가브리엘이 제안하는 의미장 존재론 역시 하나의 의미장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가브리엘의 의미장 존재론, 즉 모든 것은 특정한 의미장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이론은 모든 것을 한 번에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이 결코 아닙니다.
이 점을 가브리엘은 매우 강조합니다.
즉 의미장 존재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분명 존재한다는 겁니다.
의미장 존재론은 오히려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한 번에 총체적으로 아울러 설명하는 이론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론입니다.
더욱 정확히 말하면 의미장 존재론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는 것 자체가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 모든 것의 총체는 우리가 상상을 통해 만들어낸 형이상학적 산물이자 일종의 종교적 믿음의 대상에 불과합니다.
그 총체가 있는지 없는지 우리는 한 번도 제대로 알아낸 적이 없습니다.
물론 그 존재하는 모든 것의 총체 역시 그것에 관해서 우리가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면서 여러 주장을 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실제하는 무언가입니다.
그 총체는 형이상학적 산물들의 의미장 안에서 실재합니다.
하지만 다른 의미장 안에서는 실재하지 않습니다.

가브리엘의 바람에 따르자면 올바른 학문적 견해에 따라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야 할 것들의 의미장 안에서는 그 총체가 존재하지 않겠죠.
가브리엘 이론의 핵심은 우리가 그 무엇을 상상하든, 이 우주에 대한 그 어떤 이론을 세우든, 그 이론의 틀로서 포섭되지 않는 것들이 항상 존재한다는 겁니다.
한 이론은 한 의미장을 형성하며 그 의미장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이 항상 있습니다.
한 의미장만 고수하며 세계의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상당히 초보적인 지적 태도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시대에는 이런 초보적 태도를 자랑스럽게 견제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으며, 심지어 최고의 지성인으로 평가받는 사람들도 많이 그런다는게 가브리엘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이것보다 조금 더 업그레이드된 복잡성을 고려하는 지적 태도를 가져야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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