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천재 과학자가 말하는 시간의 철학적 의미
저는 물리학을 공부하는 내내 시간이란 무엇인가에 집착했습니다.
일반적인 관념은 시간은 과거에서부터 미래까지 흐르는 선이라는 겁니다.
이 아이디어에서 몇 가지 포인트가 상정됩니다.
첫째, 과거는 이미 고정된 채로 주어져 있는 것이며 우린 그것의 흔적을 접함으로써 그것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달의 크레이터를 보면서 우리는 과거에 운석이 부딪혀서 저런 자국이 생겼다는 걸 알 수 있죠.
둘째, 시간은 방향성을 갖습니다. 과거와 미래는 명확히 다르고 시간은 과거로부터 미래로 흘러가죠.
셋째, 시간에는 균질적인 지속, 양이 있습니다. 과거 1년과 앞으로의 1년은 서로 같은 길이입니다. 이런 일정한 시간의 길이를 시계가 측정하죠.
하지만 현대 물리학의 입장에서 시간에 대한 이런 아이디어는 틀렸습니다.
물론 일상에서는 이런 아이디어로 살아도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약 우주를 더 거시적으로 더 깊이 바라보면 문제가 생깁니다.
지금부터 그 그 이유를 설명드리죠.
첫째
시간은 질량에 따라 움직임에 따라 다르게 흐릅니다.
모든 시계는 똑같은 시간을 측정한다는
생각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충분히 좋은 두 시계를 서로 다르게 움직인 후 다시 비교해 보면 둘은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거든요.
이건 이미 100년 전에 아인슈타인이 밝힌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원자 시계를 통해 이 차이를 점점 더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습니다.
원자시계 두 개를 50cm 다른 높이에 두면 위에 있는게 더 빨리 움직입니다.
우리의 머리는 발보다 더 늙었다고 볼 수 있죠.
왜냐하면 질량이 시간을 느리게 만들기 때문에 지구라는 큰 질량을 가진 물체와 더 가까이 있는 쪽이 멀리 있는 쪽보다 시간이 더 느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간이 모두에게 똑같다는 아이디어에 익숙하기 때문에 이런 위치와 움직임에 따른 시간 차이를 생각하는 걸 생소하다고 느낍니다.
이 시간 차이는 우리의 지각 능력보다 더 미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시계는이 차이를 측정할 정도로 정밀하지 않죠.
하지만 만약 미래에 충분히 빠른 우주선이 생기면 우리는 이런 시간 차이에 적응해야 할 겁니다.
또한 만약 우리가 블랙홀과 가까운 곳에 살았다면 블랙홀 가까이에 다녀온 사람은 나머지
사람들이 더 많이 나이 들었다는 걸 분명히 알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블랙홀처럼 질량이 어마어마한 곳 근처에서는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니까 이렇듯 우주에는 단일한 시간이란 없습니다.
시간은 결코 하나의 선이 아닙니다.
둘째
지금은 오직 지역적으로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도 아인슈타인이 이 상대성 이론 이전부터 알았던 것이지만 우리가 이 생각을 소화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왜냐하면 충격적이니까요.
저는 이게 현대 물리학의 가장 충격적인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란 뭘까요?
제가 지금이라고 부르는 것과 당신이 지금이라고 부르는 것이 똑같을까요?
일반적으론 그렇죠.
저는 지금 당신에게 말하고 있고 제가 지금이라고 말할 때 당신도 지금을 똑같이 생각할 테니까요.
하지만 한번 다르게 생각해보죠.
제가 당신을 볼 때 정말로 지금 당신을 보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빛이 당신에서 적까지 와닿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몇 나노 초만큼 걸리죠. 그럼 저는 몇 나노초 이전에 당신을 보는 겁니다.
만약 당신이
목성에 있다면 저는 두시간 전에 당신을 보는 겁니다.
만약 당신이 안드로메다 은하에 있다면 수백만 년 전에 당신을 보는 셈입니다.
다른 은하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 우리가 뭘 하는지 알고 싶어도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종류의 생각을 계속할수록 우리는 점점 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이란 딱히 의미가 없다는 걸요.
우리가 지금이라고 부르는 건 우리의 뇌가 서로 사이에 빛이 이동하는 시간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만큼의 버블 안에서만 유효할뿐입니다.
우리 뇌가 10분의 1초 차이까지 시간차를 지각할 수 있다고 해 보죠.
그러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지금'은 빛이 10분의 1초만 이동하는 거리만큼의 버블 안에서 유효합니다.
그건 대략 3만 km 정도 되죠.
지구의 지름이 약 13,000km 정도 되니까 지구 안에 있는 한 우리는 서로 다 같은지 지금에 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그것뿐이죠.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까지는 빛의 속도로 4년이 걸리는데요. 그렇다면 거기에는 4년이 차이나는 다른 지금이 있는 겁니다.
그 별에 있는 생명체와 우리는 결코 같은 지금에 있을 수 없죠.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은 우주의 여러 지금 중 객관적인 지금을 고를 수는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학 이론에 그럴 수가 없죠.
왜 이게 충격일까요?
한번 현실에 대해서 생각해 보죠.
과연 뭐가 현실일까요?
우리는 보통 지금이 곧 진짜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존재했던 로마 제국은 현실은 아니고 우리가 지금 보는이 시대가 우리에게 현실이죠.
그런데 우주에서 지금은 오직 지역적으로 있을뿐입니다.
각 지역마다 다 지금이 다르다면 그 중 뭐가 현실일까요?
또한 우리는 지금 우리가 보는 현실이 과거보다 더 나중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데 우주적으로 보면 각 지역마다 각각의 지금이 있으므로 우주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 사이에는 엄밀히 말해 시간적 순서가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시간의 순서란 그저 여기서 우리가 아는 지금의 법을 안해서 나열할 수 있을 뿐이니까요.
셋째
엔트로피는 관찰자의 시각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물리학의 모든 기초적인
이론에서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열역학 제 2법칙에서는 이 차이가 있죠.
미래로 향할수록 엔트로피가 증가한다고 말하니까요.
이 법칙은 물리학자 클라우지우스가 내놨는데요.
그런데 그의 친구 볼츠만은 곧이 법칙이 통계학적이라는 걸 발견했습니다.
볼츠만은 엔트로피가 절대적 양이 아닌 얼마나 물질들이 무질서하게 배열된 나타내는 거라는 걸 이해했죠.
그런데 무질서한게 뭘까요?
만약 박스에 빨간 공과 초록 공이 서로 한쪽으로 몰려 있으면 질서가 있는 겁니다.
반면 무작위로 뒤섞여 있으면 무질서한 거죠.
이 무질서함 정도를 나타내는게 엔트로피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누군 누군가 색맹이어서 빨간 공과 초록 공을 구별 못 한다면?
그에게는 두 상태가 똑같은 정도의 질서를 가진게 됩니다.
그리고 만약 어떤 사람은 아주 시력이 예민해서 각 공이 약간씩 크기가 다른 걸 감지한다고 해보죠.
그럼 그에게 질서란 작은 공들이 한쪽에 큰 공들이 다른 쪽에 몰려 있는게 됩니다.
즉 그에게 엔트로피는 공 색깔을 기준으로 측정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죠.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질서란 관찰자의 시각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질 자체에 들어 있는 질서란 없습니다.
볼츠만이 엔트로피를 통계학적으로 해석한 것의 중요성은 우리가 시스템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하는 거시적 변수에 의해 엔트로피가 결정된다는 걸 이해했다는 겁니다.
이 거시적 변수의 유효성은 미시적 시스템을 들여다볼 경우 사라집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엔트로피는 우리가 그 거시적 시스템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 우리가 무엇을 기준으로 시스템을 기술하는 이제에 영향을 받는다는 겁니다.
이건 물리학에서 오직 엔트 피만이 과거와 미래의 차이를 결정한다는 걸 고려할 때 아주 흥미로운 결론을 낳습니다.
한번 사건의 시간적인 앞뒤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살펴보죠.
제가 책상에서 시계를 밀면 책상 표면을 따라 시계가 조금 이동하다가 멈춥니다.
이때 엔트로피는 증가합니다.
질서 있는 시계의 움직임이 마차를 통해 열에너지로 전환되어 사방으로 불규칙적으로 흩어지죠.
시계의 운동은 시간적으로 비가역적 입니다.
이 장면을 녹화해서 되돌려보면 제가 시계를 미는
시초의 움직임으로 되돌아가겠죠.
그런데 만약 엔트로피가 없다면 열 에너지로 전환되지 않은 시계의 움직임은 영원히 이어질 겁니다.
그리고 녹화된 장면을 되돌려 봐도 반대 방향으로 계속 움직이는 시계만이 있을 뿐이겠죠.
그 어떤 사건의 시작도 없이, 영원히요.
여기에는 시간에 따른 그 어떤 구별도 없습니다.
시간에 따라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우주의 모습이 바뀌는 건 오직 엔트로피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흔적을 알 수 있는 것도 오직 엔트로피 때문이죠.
우리는 지금 중세에 누군가가 잉크로 기록을 남긴 걸 읽을 수 있는데요.
그 이유는 마차를 통해 잉크가 종이 위에 흔적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펜이 약간의 마찰로 열을 발생시켜 잉크가 펜 주변을 따라 종이 위로 발산되며 무질서하게 스며 들었기 때문에 흔적이 남은 겁니다.
그 과정에서는 엔트로피가 증가했고요.
엔트로피 마찰도 없는 세상에서는 잉크가 이리저리 무한히 미끄러져서 종이 위에 흔적을 남기는게 불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이런 시간의 흐름은 어디까지나 특정 변수를 기준으로 거시적 세계를 기술할 때에만 파악
가능할뿐입니다.
엔트로피는 우리의 관점에 의존합니다.
미시적인 물리 세계에는 절대적으로 파악 가능한 엔트로피가 없습니다.
넷째
양자 중력에서 시간과 관련한 변수가 필요 없게 됩니다.
이 포인트는 아직 좀 덜 분명한 것이고 제가 아직 작업 중인 주제인데요.
저는 양자 중력에 대한 방정식을 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작업하는 방정식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해 줍니다.
우주에는 최소 시간 단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어떤 시계도 시간을 연속적으로 측정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시간의 본래 모습은 아날로그적으로 연속적으로 흘러가며 1초, 2초씩 툭툭 끊겨서 흐르는 디지털 시기에서의 시간은 잘못된 시간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시간은 그렇게 디지털적으로 끊겨 있습니다.
물론 1초 단위로 끊겨 있지 않죠.
10에 - 44승 초로 끊겨 있습니다. 아주 아주 작은 단위죠.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럼 분절된 시간을 세는 시계라는 장치 자체가 사실은 양자적인 대상입니다.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바늘의 위치들은 서로 중첩된 채로 존재하기 때문에 한
사건과 다음 사건 사이에 정확한 양의 시간 차이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확률적인 분포가 있을 뿐이죠.
이처럼 양자 역학과 일반 상대성 이론을 합치는 양자 중력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아는 시간의 모습이 사라집니다.
양자 중력에서 우주의 사건을 기술하는데 시간과 관련한 변수가 전혀 필요 없게 되죠.
완전히 기초적인 단계까지 들어가면 시간이란 어떤 절대적인 양을 갖고 흐르고 있는게 아니라 무언가를 세는 어떤 방식에 불과합니다.
2500년 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은 변화를 세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낮이 되고 밤이 되고 다시 낮이 되고 이런 변화를 세는게 바로 시간이라는 거죠.
하루, 이틀, 한 달, 1년 이렇게 말이죠.
그런데 뉴턴이 완전히 새로운 관념을 내놓았습니다.
시간은 단순히 변화를 세는게 아니라 우리가 변화를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상관 없이 일률적으로 흐르는 무언가라는 거죠.
이건 아리스토텔레스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생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에 익숙하죠.
왜냐하면 이걸 학교에서 배우니까요.
이 생각은 사회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 이후 아인슈타인은 뉴턴이 생각한 시공간이 사실은 중력장이라는 걸 깨달았죠.
절대적인 시공간이 있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옳은 점이 있으나 그 시공간은 비어 있는게 아니라 모든 곳이 가득차 있는 중력장인거죠. 휘어져 있는 4차원의 시공간이요.
그런데 현대의 양자중력의 관점 점에서 이 중력장은 양자적 특성을 갖습니다.
중첩이 되 있고, 상호작용에 영향을 받고, 확률적이죠.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나면 뉴턴의 시간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 개념이 오히려 더 그럴 듯해집니다.
양자 중력에서고 사건을 세는 것은 있습니다.
지역적이고, 확률적이고, 분절적인 최소 사건의 연속이 유일한 변수가 됩니다.
시간과 관련한 변수는 필요 없게 되죠.
그렇다면 이렇게 현대 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아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의 시간은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물리학에서는 시간이 필요가 없는데 왜 우리는 시간을 경험하는 걸까요?
먼저 중력이 약한 곳에서는 아인슈타인 시공간이 비교적 평평합니다.
그래서 얼핏보기에 뉴턴 시공간과 비슷해 보이죠.
그리고 우리는
빛이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있을 만한 조건에 있습니다.
우리만의 버블 안에 있는 거죠.
그래서 누구에게나 똑같이 단일하게 흐르는 시간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럼 과거에서부터 미래로 시간이 흐르는 건 어떻게 가능 한 걸까요?
일단 엔트로피를 다시 떠올려 봅시다.
엔트로피에 대한 가설이 하나 있습니다.
동료 물리학자들 중에서는 지지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이걸 지지하고 있습니다.
원래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면 시간이 흐를수록 무질서의 정도가 증가하니까 그렇게 따지면 먼 과거에는 물질이 아주 잘 질서 잡혀 있었겠죠.
하지만 제 생각에는 과거라고 해서 물질이 잘 질서 잡혀 있던게 아닙니다.
특정한 물리적 시스템을 가진 우리가 과거와 특정한 방식으로 상호 작용하면서 과거가 잘 질서 잡혀 있는 걸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죠.
한번 카드를 섞는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제가 카드의 순서를 외워 놨고 외워 놓은 상태에 그 패를 섞는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제 입장에서는 카드가 무질서해진거죠.
원래 제가 외웠던 순서가 흐트러졌는데 이건 제가 순서를 외워
놨기 때문에 무질서해 것일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다를게 없죠.
이 아이디어를 적용해서 생각해 보면 우리는 우주의 특정한 부분 집합으로서 우주의 나머지 부분과 상호 작용하면서 과거를 지금보다 더 질서 잡혀 있는 것으로서 경험하는 것일뿐입니다.
즉 우주 전체가 과거로부터 미래로 향하며 점점 더 무질서해지고 점점 더 무질서해진다는 거죠.
이 아이디어는 perspectival origin of Entropy라고 불립니다.
절대적인 엔트로피 증가 같은 건 없으며 엔트로피는 관점에 의존한다는 거죠.
마지막으로 시간에 관한 뇌과학적 설명이 있습니다.
시간은 흐른다, 시간은 지난다 - 이런게 기본적인 시간 인식인데요.
그런데 점점 더 많은 물리학자들과 철학자들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은 양자역학에도 일반 상대성 이론에도 열역학에 없고 우리 뇌가 작동하는 방식에 있다는 겁니다.
뇌는 미래를 계산하고 예측합니다.
우리 주변에 펼쳐지는 다양한 사건을 연결해서 시간이라는 관념에 따라 배열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의식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과거는 기억이고 미래는 예측인거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간은 정과 무관하지 않은 현상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아쉽다는 느낌을 받곤 하는데 이건 시간에 있어서 단순히 부차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우리 뇌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에 무엇을 할지를 결정하도록 진화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것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잃죠.
그런 과정 속에서 과거의 것을 붙잡으려 하고 가진 것을 잃지 않고 싶어하고 이런 것을 아쉬워하는 감정이 발달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감정이 곧 우리에 시간인 거죠.
시간이 먼저 있고 그 속에서 우리가 아쉬움을 느끼는게 아니라 우리가 아쉬움을 느끼도록 뇌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시간의 경험이 만들어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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